한국 기업의 터널링: 지속되는 관행과 개혁의 과제
한국 기업들의 터널링(tunneling) 관행이 지속되면서 국내 증시의 저평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터널링은 기업의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회사의 자산이나 이익을 부당하게 사적 이익을 위해 이전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으며,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터널링의 배경과 현황
한국 기업의 터널링 문제는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기업 집단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와 지배주주의 강력한 영향력이 터널링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어왔다. 특히 지배주주의 소유지배권 괴리가 클수록 터널링을 통해 외부 소액주주의 부를 이전시키려는 동기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국 상장기업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터널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유동자산을 이용한 터널링이 주목받고 있는데, 일부 기업들이 특수관계자에 대한 매출채권이나 대여금 등 유동자산을 활용하여 자원을 이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터널링의 주요 형태
- 특수관계자 거래를 통한 이익 이전
상장기업과 지배주주가 소유한 비상장 개인회사 간의 내부거래를 통해 이익을 이전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는 상장기업의 이익을 비상장 개인회사로 빼돌리는 형태로 나타난다. - 유동자산을 이용한 터널링
매출채권이나 대여금 등 유동자산을 활용하여 특수관계자에게 자원을 이전하는 방식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감지하기 어려워 최근 주목받고 있다. - 모자회사 중복상장
이른바 '쪼개기 상장'을 통해 자회사를 별도로 상장시켜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도 터널링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 불공정한 내부거래
계열사 간 거래에서 시장가격과 동떨어진 조건으로 거래하여 특정 계열사에 이익을 몰아주는 방식이다.
터널링이 기업 가치와 투자 환경에 미치는 영향
터널링은 기업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저해하여 기업 가치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 기업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글로벌 평균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은 이러한 터널링 위험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2023년 경영분석 결과에 따르면, 국내 기업 10곳 중 4곳이 '한계기업'으로 분류되었다. 이는 연간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상황의 배경에는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과 터널링 같은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터널링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자본 조달 비용을 높이고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와 기업의 대응 전략
-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는 상장기업들에게 연간 1회 이상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자율적으로 공시하도록 권고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는 기업들의 자발적인 가치 제고 노력을 유도하기 위한 조치다. - 지배구조 개선 공시
모자회사 중복상장이나 비상장 개인회사 보유 등 지배구조 관련 이슈에 대해 자율공시를 권고하고 있다. 이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보다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 법적 규제 강화
공정거래법을 통해 부당지원행위와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금융그룹감독법 등을 통해 금융계열사를 통한 터널링을 방지하고자 한다. - 기업들의 자발적 노력
일부 대기업 집단에서는 순환출자 해소,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 등을 통해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제 비교 및 향후 전망
터널링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신흥국 시장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관찰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OECD 회원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향후 한국 기업들의 터널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성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지배구조 개선: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투명성 제고: 특수관계자 거래에 대한 공시 강화와 함께, 기업들의 자발적인 정보 공개가 요구된다.
- 주주 권익 보호: 소액주주의 권리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 규제의 실효성 제고: 현행 규제의 허점을 보완하고 실질적인 제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기업문화 변화: 장기적으로는 기업들이 주주가치 제고와 지속가능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터널링 문제의 해결은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자본시장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과제다. 정부의 규제와 기업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지속적이고 일관된 정책 추진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장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터널링의 역사적 맥락과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한국에서 터널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부실한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경영으로 인해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
IMF 외환위기와 기업 구조조정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 투명성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이 주요 과제로 부상했고, 특히 재벌 기업들의 불투명한 내부거래와 터널링 문제가 집중적으로 지적됐다.
제도적 개선 노력
2000년대 들어 정부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터널링을 방지하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2001년 도입된 '주식대량보유 보고제도'(5% 룰)은 지배주주의 지분 변동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해 터널링의 위험을 줄이고자 했다. 또한 2005년부터 시행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는 편법 증여를 통한 경영권 승계를 막고자 하는 조치였다.
지속되는 문제와 새로운 형태의 터널링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터널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형태의 터널링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물적분할을 통한 자회사 상장이나 비상장 계열사를 활용한 이익 이전 등이 새로운 이슈로 부각됐다.
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
터널링 문제는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기업의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고 특정 주주나 계열사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면서, 전반적인 경제 효율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이는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국내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와 계열사 간 내부거래에 안주하면서 혁신과 효율성 제고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 약화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자본시장 발전의 걸림돌
터널링 문제는 한국 자본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기업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주식시장의 활성화가 지연됐고, 이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이어졌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용어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회자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주가가 실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받는 현상이 지속됐다. 이는 한국 경제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최근의 터널링 사례 분석
최근 몇 년간 한국 기업들의 터널링 사례는 더욱 복잡하고 정교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규제를 우회하면서도 지배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물적분할을 통한 자회사 상장
대기업 집단들이 핵심 사업부문을 물적분할하여 자회사로 만든 뒤 이를 별도로 상장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배주주는 자회사 지분을 우선 확보하고, 이후 주가 상승의 이익을 독점적으로 누리는 방식으로 터널링이 이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예를 들어, 2021년 한 대기업 그룹의 배터리 사업부 분할 상장 과정에서 이러한 논란이 불거졌다. 해당 기업의 주주들은 유망 사업부문이 분리됨으로써 기존 주주의 이익이 침해된다고 주장했다.
비상장 계열사를 활용한 이익 이전
상장 기업의 이익을 비상장 계열사로 이전하는 방식의 터널링도 여전히 관찰되고 있다. 이는 주로 내부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상장 기업이 비상장 계열사에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함으로써 이익을 이전하는 방식이다.
2022년 한 유통 대기업 그룹의 경우, 그룹 내 비상장 물류회사와의 거래 과정에서 이러한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기업은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물류 서비스를 이용함으로써 비상장 계열사에 이익을 몰아준다는 지적을 받았다.
신기술 투자를 통한 경영권 강화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지배주주의 경영권을 강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터널링이 관찰되고 있다. 기업이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신기술 분야의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지배주주 일가가 해당 스타트업의 지분을 미리 확보하는 방식이다.
2023년 한 IT 대기업의 AI 관련 스타트업 인수 과정에서 이러한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기업의 지배주주 일가가 인수 대상 기업의 지분을 사전에 확보했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국제 투자자들의 시각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들의 터널링 문제를 여전히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주식시장의 저평가 원인 중 하나로 기업 지배구조 문제와 터널링 위험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ESG 투자 확대와 터널링 문제
최근 글로벌 투자 트렌드로 부상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확대와 맞물려,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 문제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들의 ESG 성과, 특히 지배구조(G) 부문에서의 개선이 더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2023년 한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ESG 평가에서 지배구조 부문 점수가 가장 낮았으며, 특히 터널링 위험이 주요 감점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주행동주의의 대두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 투자자들의 주주행동주의가 강화되는 추세다. 글로벌 헤지펀드들이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2022년 한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가 한국의 대형 전자기업을 대상으로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해당 펀드는 기업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 해소와 투명한 경영을 촉구했다.
터널링 방지를 위한 최근의 노력
한국 정부와 기업들도 터널링 문제 해결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도적 개선 노력
- 기업지배구조 보고서 의무화: 2019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에 대해 기업지배구조 보고서 공시를 의무화했다. 이를 통해 기업들의 지배구조 투명성을 제고하고자 했다.
-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2021년 상법 개정을 통해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됐다. 이는 자회사의 부실경영에 대해 모회사 주주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함으로써, 복잡한 기업 구조를 통한 터널링을 방지하고자 하는 조치다.
- 금융그룹감독법 시행: 2021년 6월부터 시행된 금융그룹감독법은 금융계열사를 통한 터널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기업들의 자발적 노력
일부 대기업 집단에서는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자발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다.
-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단순화하고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기업들이 증가하고 있다.
- 이사회 독립성 강화: 사외이사의 비중을 높이고, 이사회 내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이사회의 독립성을 제고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 주주친화정책 강화: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주주가치를 제고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향후 과제와 전망
한국 기업들의 터널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법적·제도적 개선 과제
- 그룹 차원의 통합 공시 강화: 복잡한 기업집단 구조에서 발생할 수 있는 터널링을 방지하기 위해, 그룹 차원의 통합 공시 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 소수주주권 보호 강화: 집단소송제 확대, 다중대표소송 요건 완화 등을 통해 소수주주의 권리를 더욱 보호해야 한다.
- 규제의 실효성 제고: 현행 규제의 허점을 보완하고, 위반 시 실질적인 제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 문화와 인식의 변화
- 장기적 가치 창출 중심의 경영: 단기적 이익 추구나 지배주주의 이익만을 위한 경영에서 벗어나, 모든 이해관계자의 장기적 가치 창출을 위한 경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 투명성과 책임경영의 내재화: 기업 스스로 투명성과 책임경영의 가치를 내재화하고, 이를 기업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글로벌 스탠다드 준수
-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지배구조 확립: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 등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 ESG 경영의 실질적 이행: 형식적인 ESG 대응이 아닌, 실질적인 ESG 경영을 통해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결론
한국 기업들의 터널링 문제는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구조적인 문제다. 이는 단순히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닌, 한국 경제 전반의 경쟁력과 신뢰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다.
터널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의 제도적 개선, 기업들의 자발적 노력, 그리고 시장 참여자들의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다. 특히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세계적 수준의 지배구조와 경영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는다면, 한국 기업들의 실질적인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고, 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경제의 질적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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